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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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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은 에리트레아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혈통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식민지화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인들이 유입되었으며, 1939년에는 76,000명 이상의 이탈리아인이 에리트레아에 거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에리트레아 사회에 동화되었고, 현재는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며,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다. 아스마라에는 이탈리아 식민 시대의 건축물이 남아 있으며, 이탈리아의 문화적 유산이 에리트레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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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프랑코 로시는 1963년 에리트레아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 《사크로 GRA》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불의 바다》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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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
개요
아스마라 교회
1923년 이탈리아인들이 건설했으며 현재 에리트레아 이탈리아인들의 만남의 장소인 아스마라의 아스마라 성모 로사리오 교회
언어이탈리아어, 티그리냐어
종교주로 로마 가톨릭교회, 소수의 에리트레아 정교회.
인구
인구2008년 기준 조상 중에 이탈리아인이 있는 에리트레아인 약 10만 명.
국적2024년 기준 이탈리아 국적자 1,100명.
거주 지역
주요 거주지아스마라, 마사와, 케렌
관련 민족
관련 민족이탈리아인, 이탈리아계 알제리인, 이탈리아계 앙골라인, 이탈리아계 이집트인, 이탈리아계 에티오피아인, 이탈리아계 리비아인, 이탈리아계 모로코인, 이탈리아계 모잠비크인, 이탈리아계 소말리아인, 이탈리아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이탈리아계 튀니지인, 이탈리아계 짐바브웨인

2. 역사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의 조상은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식민지화가 시작될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야 대규모로 정착했다.[5] 1939년 에리트레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76,000명 이상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이 있었으며, 대부분은 아스마라에 거주했다(도시 전체 인구 93,000명 중 53,000명).[6][7] 1941년 11월 연합국에 의해 식민지가 정복된 후, 많은 이탈리아 정착민들은 1946년에는 38,000명으로 줄었다.[8] 여기에는 이탈리아계와 에리트레아계 혼혈 인구도 포함되며, 현재 에리트레아에 거주하는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 대부분은 이 혼혈 집단에 속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남아있는 이탈리아인 중 다수는 에리트레아 사회에 동화되었지만, 일부는 오늘날 무국적자 신세가 되었는데, 결혼이나, 드물게 국가에서 부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스마라의 엠파이어 영화관은 1937년에 건설되었다. 이 영화관은 이탈리아 아르데코 건축의 걸작으로 널리 여겨진다.




1938년 아스마라의 에리트레아 철도 역, 승객들이 ''리토리나''에 탑승하고 있다.


1882년부터 1941년까지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 60년 동안 에리트레아, 주로 아스마라 지역에는 20세기 초부터 이주해 온 이탈리아 식민지 개척자들이 거주했다.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4,000명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초 100,000명 가까이로 증가했다.[10]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행정은 에리트레아 사회의 의료 및 농업 분야에 자체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즉, 도시 지역에서 위생 및 병원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향상). 또한 이탈리아는 많은 에리트레아인들을 공공 서비스 (특히 경찰 및 공공 사업 부서)에 고용했으며 아스마라와 마사와의 도시 편의 시설 제공을 감독했다. 문화, 언어 및 종교적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지역에서 이탈리아 총독들은 상당한 수준의 통일성과 공공 질서를 유지했다. 이탈리아는 또한 아스마라-마사와 케이블카와 에리트레아 철도를 포함하여 에리트레아에 많은 주요 사회 기반 시설 프로젝트를 건설했다.[11]

1922년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으면서 에리트레아의 식민 정부에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 무솔리니는 1936년 5월 이탈리아 제국을 수립했다. 파시스트는 이탈리아인의 정치적,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가혹한 통치를 부과했다. 에리트레아인들은 1938년 공공 부문에서 하찮은 직위로 강등되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산업 중심지로 선택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농업 개혁을 계속 시행했지만 주로 이탈리아 식민지 개척자가 소유한 농장에서 시행했다(커피 수출이 30년대에 급증했다). 1940년 아스마라 지역에는 건설, 기계, 섬유, 전기 및 식품 가공 분야에 집중된 2,000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1939년 에리트레아의 생활 수준은 이탈리아 식민지 개척자와 에리트레아인에게 아프리카에서 가장 좋은 수준으로 여겨졌다.[12]

무솔리니 정부는 식민지를 미래 확장을 위한 전략적 기지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통치했으며, 1935~1936년 에티오피아 식민지화를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는 기지로 에리트레아를 사용했다. 1939년에는 싸울 수 있는 에리트레아 남성의 거의 40%가 이탈리아 식민군에 입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최고의 이탈리아 식민군은 이탈리아 원수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전설적인 장교 아메데오 길레가 언급했듯이 에리트레아 아스카리였다.[13]

1910년부터 2008년까지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 인구
연도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에리트레아 인구
19101,000 (0.26%)390,000
19353,100 (0.51%)610,000
193976,000 (10.27%)740,000
194638,000 (4.37%)870,000
2008800 (0.02%)4,500,000



마사와에 정착한 이탈리아인


아스마라는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거주했으며, 도시의 건축 양식 또한 이탈리아풍을 띠게 되었다.[14]

오늘날 아스마라는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건축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여기에는 아르 데코 양식의 시네마 임페로, "입체파" 양식의 아프리카 펜션, 절충주의 양식의 정교회 대성당, 옛 오페라 하우스, 미래주의 양식의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 신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스마라 로사리 성모 교회, 신고전주의 양식의 총독 관저 등이 포함된다. 이 도시에는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의 별장과 저택들이 즐비하다. 아스마라 중심부의 대부분은 1935년에서 1941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인들이 불과 6년 만에 거의 도시 전체를 설계하고 현지 에리트레아인들이 건설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5]

1939년 이탈리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스마라 시의 인구는 98,000명이었으며, 그 중 53,000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이 사실은 아스마라를 아프리카 이탈리아 제국의 주요 "이탈리아 도시"로 만들었다. 그 해에 에리트레아 전체의 이탈리아인은 75,000명이었다.[16]

이탈리아인들은 아스마라와 마사와 지역에 수많은 산업 투자를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산업화는 중단되었다.[17]

''아프리카 오리엔탈레 이탈리아나'' 지도: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제국 시대(1936–1941)에 최대로 확장되었으며, 정복된 에티오피아 북부는 에리트레아의 "아스카리"가 에티오피아 정복에 기여한 대가로 이탈리아인에 의해 에리트레아에 할당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에리트레아는 영국 제국의 군정 통치를 받았다. 영국은 처음에는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행정 체제를 유지했지만, 곧 이 나라는 1940년대 후반 영국으로부터, 그리고 1952년 에리트레아를 병합한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18]

이탈리아가 패배한 후, 7만 명의 이탈리아 정착민이 에리트레아에 남았다.[18] 영국 군정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과 연루된 정착민 다수를 체포하고 추방했다.[18] 일부 정착민은 에리트레아인들과 충돌을 겪기도 했다.[18]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한 후 에리트레아를 떠나기 시작했고, 1949년 영국의 인구 조사 당시 아스마라에는 총 인구 127,579명 중 17,183명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만 남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해 동안 빈첸초 디 메글리오는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인들을 정치적으로 옹호했으며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19] 전쟁 후 그는 ''코미타토 라프레젠타티보 이탈리아니 델' 에리트레아''(CRIE, 에리트레아 이탈리아인 대표 위원회)의 이사로 임명되었다. 1947년 그는 이탈리아에 호의적인 에리트레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아소치아치오네 이탈로-에리트레이"''(이탈로-에리트레아 협회)와 ''"아소치아치오네 베테라니 아스카리"''(아스카리 참전용사 협회)의 창설을 지지했다.[20]

1947년 9월 아스마라에서 그는 에리트레아 내 이탈리아의 존재에 호의적인 에리트레아 정당인 ''파르티토 누오바 에리트레아 프로 이탈리아''(신 에리트레아 친 이탈리아 당)를 공동 설립했다. 이 정당은 한 달 만에 20만 명 이상의 가입 신청을 받았으며, 대부분이 전 이탈리아 군인과 에리트레아 아스카리였다. 이 단체는 심지어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까지 받았다. 이 정당의 주요 목표는 에리트레아의 자유였지만, 독립 이전에 최소 15년 동안 이탈리아가 통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이탈리아령 소말리아에서 일어날 일).

1947년 평화 조약을 통해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은 식민지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 특히 에티오피아 제국이 1952년 에리트레아를 장악한 후 이탈리아 공동체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2. 1.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 (1882-1941)

1882년부터 1941년까지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 60년 동안 에리트레아, 주로 아스마라 지역에는 20세기 초부터 이주해 온 이탈리아 식민지 개척자들이 거주했다.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4,000명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초 100,000명 가까이로 증가했다.[10]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행정은 에리트레아 사회의 의료 및 농업 분야에 자체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즉, 도시 지역에서 위생 및 병원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향상).

또한 이탈리아는 많은 에리트레아인들을 공공 서비스 (특히 경찰 및 공공 사업 부서)에 고용했으며 아스마라와 마사와의 도시 편의 시설 제공을 감독했다. 문화, 언어 및 종교적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지역에서 이탈리아 총독들은 상당한 수준의 통일성과 공공 질서를 유지했다. 이탈리아는 또한 아스마라-마사와 케이블카와 에리트레아 철도를 포함하여 에리트레아에 많은 주요 사회 기반 시설 프로젝트를 건설했다.[11]

1922년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으면서 에리트레아의 식민 정부에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

무솔리니는 1936년 5월 이탈리아 제국을 수립했다. 파시스트는 이탈리아인의 정치적,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가혹한 통치를 부과했다. 에리트레아인들은 1938년 공공 부문에서 하찮은 직위로 강등되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산업 중심지로 선택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농업 개혁을 계속 시행했지만 주로 이탈리아 식민지 개척자가 소유한 농장에서 시행했다(커피 수출이 30년대에 급증했다). 1940년 아스마라 지역에는 건설, 기계, 섬유, 전기 및 식품 가공 분야에 집중된 2,000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1939년 에리트레아의 생활 수준은 이탈리아 식민지 개척자와 에리트레아인에게 아프리카에서 가장 좋은 수준으로 여겨졌다.[12]

무솔리니 정부는 식민지를 미래 확장을 위한 전략적 기지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통치했으며, 1935~1936년 에티오피아 식민지화를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는 기지로 에리트레아를 사용했다. 1939년에는 싸울 수 있는 에리트레아 남성의 거의 40%가 이탈리아 식민군에 입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최고의 이탈리아 식민군은 이탈리아 원수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전설적인 장교 아메데오 길레가 언급했듯이 에리트레아 아스카리였다.[13]

1910년부터 2008년까지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 인구
연도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에리트레아 인구
19101,000 (0.26%)390,000
19353,100 (0.51%)610,000
193976,000 (10.27%)740,000
194638,000 (4.37%)870,000
2008800 (0.02%)4,500,000


2. 1. 1. 아스마라의 발전



아스마라는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거주했으며, 도시의 건축 양식 또한 이탈리아풍을 띠게 되었다.[14]

오늘날 아스마라는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건축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여기에는 아르 데코 양식의 시네마 임페로, "입체파" 양식의 아프리카 펜션, 절충주의 양식의 정교회 대성당, 옛 오페라 하우스, 미래주의 양식의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 신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스마라 로사리 성모 교회, 신고전주의 양식의 총독 관저 등이 포함된다. 이 도시에는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의 별장과 저택들이 즐비하다. 아스마라 중심부의 대부분은 1935년에서 1941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이는 이탈리아인들이 불과 6년 만에 거의 도시 전체를 설계하고 현지 에리트레아인들이 건설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5]

1939년 이탈리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스마라 시의 인구는 98,000명이었으며, 그 중 53,000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이 사실은 아스마라를 아프리카 이탈리아 제국의 주요 "이탈리아 도시"로 만들었다. 그 해에 에리트레아 전체의 이탈리아인은 75,000명이었다.[16]

이탈리아인들은 아스마라와 마사와 지역에 수많은 산업 투자를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산업화는 중단되었다.[17]

이탈리아의 1943년 9월 휴전까지 일부 에리트레아 식민군이 이탈리아 게릴라 전쟁을 연합군에 대항하여 지원했다. 에리트레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대영 제국의 군사 행정 하에 놓였다.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패배한 후 에리트레아에서 떠나기 시작했으며, 1949년 영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스마라의 전체 인구 127,579명 중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은 17,183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정착민들은 이탈리아로 떠났고, 일부는 미국, 중동, 호주로 이주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에리트레아는 영국 제국의 군정 통치를 받았다. 영국은 처음에는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행정 체제를 유지했지만, 곧 이 나라는 1940년대 후반 영국으로부터, 그리고 1952년 에리트레아를 병합한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18]

이탈리아가 패배한 후, 7만 명의 이탈리아 정착민이 에리트레아에 남았다.[18] 영국 군정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과 연루된 정착민 다수를 체포하고 추방했다.[18] 일부 정착민은 에리트레아인들과 충돌을 겪기도 했다.[18]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한 후 에리트레아를 떠나기 시작했고, 1949년 영국의 인구 조사 당시 아스마라에는 총 인구 127,579명 중 17,183명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만 남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해 동안 빈첸초 디 메글리오는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인들을 정치적으로 옹호했으며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19] 전쟁 후 그는 ''코미타토 라프레젠타티보 이탈리아니 델' 에리트레아''(CRIE, 에리트레아 이탈리아인 대표 위원회)의 이사로 임명되었다. 1947년 그는 이탈리아에 호의적인 에리트레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아소치아치오네 이탈로-에리트레이"''(이탈로-에리트레아 협회)와 ''"아소치아치오네 베테라니 아스카리"''(아스카리 참전용사 협회)의 창설을 지지했다.[20]

1947년 9월 아스마라에서 그는 에리트레아 내 이탈리아의 존재에 호의적인 에리트레아 정당인 ''파르티토 누오바 에리트레아 프로 이탈리아''(신 에리트레아 친 이탈리아 당)를 공동 설립했다. 이 정당은 한 달 만에 20만 명 이상의 가입 신청을 받았으며, 대부분이 전 이탈리아 군인과 에리트레아 아스카리였다. 이 단체는 심지어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까지 받았다. 이 정당의 주요 목표는 에리트레아의 자유였지만, 독립 이전에 최소 15년 동안 이탈리아가 통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이탈리아령 소말리아에서 일어날 일).

1947년 평화 조약을 통해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은 식민지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 특히 에티오피아 제국이 1952년 에리트레아를 장악한 후 이탈리아 공동체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2. 2. 1. 독립 투쟁과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의 역할

제2차 세계 대전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한 후 에리트레아는 영국 제국의 군정 통치를 받았다. 영국은 처음에는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행정 체제를 유지했지만, 곧 이 나라는 1940년대 후반 영국으로부터, 그리고 1952년 에리트레아를 병합한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18]

이탈리아가 패배한 후, 7만 명의 이탈리아 정착민이 에리트레아에 남았다.[18] 영국 군정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과 연루된 정착민 다수를 체포하고 추방했다.[18] 일부 정착민은 에리트레아인들과 충돌을 겪기도 했다.[18]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한 후 에리트레아를 떠나기 시작했고, 1949년 영국의 인구 조사 당시 아스마라에는 총 인구 127,579명 중 17,183명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만 남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해 동안 빈첸초 디 메글리오는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인들을 정치적으로 옹호했으며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19] 전쟁 후 그는 ''코미타토 라프레젠타티보 이탈리아니 델' 에리트레아''(CRIE, 에리트레아 이탈리아인 대표 위원회)의 이사로 임명되었다. 1947년 그는 이탈리아에 호의적인 에리트레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아소치아치오네 이탈로-에리트레이"''(이탈로-에리트레아 협회)와 ''"아소치아치오네 베테라니 아스카리"''(아스카리 참전용사 협회)의 창설을 지지했다.[20]

1947년 9월 아스마라에서 그는 에리트레아 내 이탈리아의 존재에 호의적인 에리트레아 정당인 ''파르티토 누오바 에리트레아 프로 이탈리아''(신 에리트레아 친 이탈리아 당)를 공동 설립했다. 이 정당은 한 달 만에 20만 명 이상의 가입 신청을 받았으며, 대부분이 전 이탈리아 군인과 에리트레아 아스카리였다. 이 단체는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까지 받았다. 이 정당의 주요 목표는 에리트레아의 자유였지만, 독립 이전에 최소 15년 동안 이탈리아가 통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1947년 평화 조약을 통해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은 식민지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 특히 에티오피아 제국이 1952년 에리트레아를 장악한 후 이탈리아 공동체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3. 언어와 종교

대부분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들은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다. 에리트레아에서 스포츠 활동으로 유명했던 마지막 남은 이탈리아어 학교인 아스마라 이탈리아 학교는 2020년에 문을 닫았다.[22] 이탈리아어는 에리트레아 상업에서 여전히 사용된다.[23] 1975년까지 아스마라에는 이탈리아 고등학교, 이탈리아 기술 연구소, 이탈리아 중학교와 이탈리아 교수가 진행하는 의학 특별 대학 과정이 있었다.[24]

아스마라의 이탈리아 영사 지노 코르벨라는 1959년에 약 20,000명의 에리트레아인이 식민지 시대에 에리트레아 여성과 사생아를 낳은 이탈리아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이탈리아어의 에리트레아 보급을 뒷받침했다고 추정했다.[2][3] 새로운 세대의 동화된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들(2007년에는 약 900명)은 티그리냐어를 사용하고 이탈리아어를 조금만 하거나 이탈리아어를 제2언어로 사용한다.

거의 모두 로마 가톨릭 기독교의 라틴 전례를 따르며, 일부는 기독교의 다른 교파로 개종한다.

4. 주요 인물


  • 페르디난도 마르티니는 초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총독이었다.
  • 루치아노 비올란테는 전 이탈리아 하원 의장이었다.
  • 브루노 라우지는 싱어송라이터였다.
  • 이탈로 바사요는 축구 선수였다.
  • 라라 생 폴은 디자이너였다.
  • 마리나 콜라산티는 작가였다.
  • 레모 지로네는 배우였다.
  • 멜리사 키멘티는 배우였다.
  • 이네스 펠레그리니는 배우였다.
  • 비토리오 롱기는 언론인이었다.

5. 유산과 현재

참조

[1] 웹사이트 The Italian Ambassador stated at the 2008 Film Festival in Asmara http://www.ambberlin[...] 2012-02-18
[2] 웹사이트 Descendants of Italians in Eritrea (in Italian) http://www.camera.it[...]
[3] 웹사이트 Descendants of Italians in Eritrea (in English) http://babelfish.yah[...]
[4] 웹사이트 Italian in Eritrea https://joshuaprojec[...]
[5] 웹사이트 Informazioni storiche sull'Eritrea https://www.archivio[...] 2023-03-12
[6] 웹사이트 L'italiano nell'interazione interetnica del contesto eritreo: fonti storiche e testimonianze contemporanee https://www.research[...] 2023-03-12
[7] 웹사이트 Cronologia storica https://www.eritreae[...] 2023-03-12
[8] 웹사이트 Gli anni difficili (1941-1951) http://www.maitacli.[...] 2023-03-12
[9] 서적 Bradt Travel Guide: Eritrea Bradt
[10] 웹사이트 L'emigrazione italiana in Africa orientale http://www.ilcornoda[...] 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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